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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쪼가리들

뒷말 2012/04/10 23:10

“곰처럼 우직하고 뱀처럼 간교하라. 그리고 둘다 상대의 목을 물어 뜯는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일전에 뭔가 신자유주의적인 활기가 넘치는 사회대였는지 경영대였는지와 무기력한 패배감이 감싸고 있는 인문대를 대조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자료실에서 짐을 챙기다가 문득 그 생각이 별로 틀린 점이 없다고 느꼈다. 오래된 고담준론, 혹은 헛소리로 가득찬 책들 속에서(도올의 책이 오늘 눈에 띄였다)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을 팔아먹으면서 어떻게 내 보신을 해볼까(다분히 헬레니즘적인 의미다) 고민을 하고 있으니 든 생각이다. 그러고보니 (뤽 페리 책 주장대로라면)니체의 소망이 꽤 성취된 현대에 니체를 유일하게 추앙하는 족속들은 다름 아닌 그가 혐오하던 기생자들이며 학자들이다. 불쌍하다.


철학에 관해 썰을 푸는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철학을 전공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원전 그 자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만큼의 이해를 갖춘다던가 아니면 새로운 철학을 할 수 있다던가 둘 중 하나는 해야한다. 나는 과연 지금 여기에 얼마나 근접해있는가.

 

완전히 마음에 들었던 책은 아니지만 지난번에 읽었던 그 자유주의 책에서 영감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한 생각이다: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다. 아버지께 배운 것이고, 의인들에게 배운 것이고, 종교에서 배운 것이고, 철학자와 학자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나 자신이 바뀔 수는 있어도, 나는 나 자신으로서 일관성을 지녀야한다. 그리고 학자로서, 나는 나의 앎에 충실해야 한다. 앎은 진실에 좌우된다. 진실에 승복하지 못하면 그 것은 학자로서의 본령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 것이야말로 일관성을 상실하는 최악의 경우이다. 하지만 적어도 잠정적으로(과학에서나, 신학에서나 … ) 진리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진실은 계속 바뀐다. 따라서 학문은 자기파괴적이다. 계속 새로이 알게되는 진실을 갱신하는 과정은 지금까지 자신을 구성했던 것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과정이다. 내가 학자라고 자처하고자 한다면 분명 나는 평생 이 과정을 견뎌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나 자신이 아닌, 또다른 측면으로서의 나 자신도 필요할 것이다. 분명히. 여담이지만.

하지만 한도사씨가 진중권씨와 허지웅씨 같은 생각을 ‘싸워보지 않은 사람’의 논리라고 평가하는 것에는 분명 시사점이 있다. 먹물들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괴물과 싸울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일리가 있다. 먹물로서, 단순히 먹물로서의 자위만이 아닌 실제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만 한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이를 예전보다는 조금 더 용이케끔 한 형태라고 생각하지만, 더 나아가야 한다.

버스 제일 뒷좌석으로 가는데 왠지 오른쪽 좌석에 앉는게 편하다고 느껴진 것을 들고 깨달은 생각: 어릴 땐 확실히 결정론/경향성을 싫어했다. 뭐 지금도 확실히 ‘결정론’이 그렇게 썩 기분좋게 들리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확실히 나 자신이 ‘이미 나에게 결정된 바’인 생리적 경향성등에 의해 휘둘리는 것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지녔다. 뭐 사실 그때랑 지금이랑 그렇게 아주 사람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제는 그러한 나 자신의 경향성을 그냥 좋다싫다 할거 없이 그냥 받아들이게 된 것 없다. 한마디로 이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버스 뒷자석에 앉게 되었다. 흄/무어를 알게되면서 사실/당위간의 독립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덕분인지, 현실(진실) 자체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 하여간 마음이 편해졌다

한국철학과 ‘한국어를 사용한’ 철학 등에 관련된 일련의 포스팅을 보고 든 생각: 한학기 동안 통사론을 두고 공부한 생각은 과연 각 언어간의 차이, 특히 문법에 있어서 뭔가 그 언어사용자들의 정신적 정체성을 규정할만한 그런 요소가 있겠느냐는 의문이었다. 어차피 한국어나 영어나 Verb Raising Parameter의 유무 따위의 지극히 기계적인 차이가 있을뿐인 터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각 언어간에 차이가 있다면 단어들(Lexicon)에 그 차이가 있을텐데, 단어들은 분명 각 문화권의 언어사용자들이 공유하는 역사, 문화, 전통들을 잘 대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논의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실 이 문제는 결국 (의미가 별도로 실재한다는 가정하에) a라는 의미를 지칭하는 언어(1)의 애매한 표현 A, 언어(2)의 애매한 표현 B, 이들 각각이 a라는 의미 말고 지칭하는 또다른 의미들간의 불일치에서 일어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단어 A와 B 각각은 서로 다른 언어적 변천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혹은 다른 형성원리를 거쳐 생겨났기에) 각각 서로 다른 의미들을 포함하는 애매한 표현들이 된 것일 것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이니, 콰인의 번역 불가능성 논증이니 하는 것도 다들 이런 차원에서 벌어질 얘기일 것이다 … 나는 어차피 아는게 없지만.
하여간 그러면 과연 한국학자가 외국어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의 결론은 아마 잠정적으로는 ‘해당 단어에 대한 어원 및 뉘앙스’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한, 그렇게 한 언어를 하는 것이 사유체계 그 자체에 영향을 주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얘기다 ….

아버지께서 동창분들과 약주를 하시고 오셔서 컴퓨터를 하던 나를 거실로 불러내셔서 인생에 대해 한 말씀을 하셨다. 어제인가 라이프니츠의 불우한 생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시고 많은 생각을 하신 것 같았다. 뭐 여러 얘기가 있었지만 강조하신 것은 결국 삶에 대한 최소한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이셨다. (뭐 애초에 내가 세속적인 부귀나 가치에 관심을 가졌으면 이따위 학문을 하지 않았겠지만) 금융자본가들처럼 ‘야비한’ 방법을 써서 돈을 벌기보다는 라이프니츠, 테레사 수녀, 혹은 많은 소시민들이야말로 훨씬 ‘가치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역시 아버지에게 있어서 할아버지의 존재는 크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된다. 아직 젊던 시절에 할아버지를 여읜 것은 아버지께 있어 두고두고 뭔가를 맻히게끔 하는 원인이 된 것 같다. “삶의 등대를 가지라”는 얘기도 할아버지로부터 이미 전해져오기 시작했던 얘기인 것 같다. 평생 사치를 하질 않으셨고, ‘처음에 가졌던 가치관’을 상기하게끔 하는 ‘등대’를 가지라는 점은 바로 할아버지로부터 전해져내려온 아버지의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나의 가치관이 이런 면에서 부모님의 가치관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사실 나의 이러한 가치관이 형성되는데 부모님의 생각 또한 큰 기여를 했다고 보는게 자연스러울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께서는 그래도 할아버지 때보다는 나아진거라고 말씀하시지만, (솔직히 내용 자체는 ‘소박’하고) 이미 여러번 말씀하셨던 내용을 그냥 쏟아내듯이 말씀하시는걸 듣는건 확실히 참을성을 요한다. 내가 만약 아이를 낳게되면, 나는 좀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서 Intriguing한 방법을 취해야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확실히 창작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린 것 같다. 어떻게 이차 창작들까지는 구상도 있고 한데 실제로 얘네들을 잘 쓰게 되지도 않고, 완전한 창작은 중학교-고등학교 때 이후로 내 생각이 멈춘 것 같다. 일단 중학교 때의 그 서사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시금 자유로이 환상적 서사를 생각해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약 10여년간 쌓아온 것들이 그 제약이 되질 않았으면 좋겠다.

 

철학 개론 수업을 듣다 새삼 느낀건데, 나는 확실히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등의 핵심문제에 대해 무척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존재론에 있어서는 자연주의적-기능주의적 입장을, 인식론에서는 흄이 지적한 한계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실용론적 측면에서 현대과학과 현대 철학의 성과를 인정하는 입장, 그리고 가치론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가치주관적 입장이면서 적어도 가치가 ‘이론화’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자연주의적 오류 논변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어하)는 입장이다. 이들 ‘제일철학’들에 대해서 내가 명확한 주장을 취하는 것은 분명 나의 능력의 한계일 것이고, 내가 앞으로 학문을 함에 있어서 ‘꼼수’를 노리고 싶어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는 입장에서, 설령 불분명하고 유보적이라 할지라도, 이런 제일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나의 견지를 명확히 확립해놓고 이들에 대한 나의 논변을 마련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이들 문제들에 대해서 괜찮은 논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철학적 전통에 대한 보다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내 주변의 ‘예술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상: 예술적으로, 어찌보면 딜레탕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들이 발칙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많고 한 것이다. 솔직히 아예 돈을 바라보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예술적이고 빡세게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살려고 하는 방식이 뭔가 내가 싫어하는 어중간한 길을 가려는게 아닐까 하는 염려도 자주 든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부와 춤을 동시에 열심히 하는 것을 꾸준히 해야겠지만 … 하여간 쉽지 않다. 노력이 필요하다.
뭐 그러면서 새삼 느낀건데, 나 자신이 그런 ‘발칙함’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이제 나 자신이 꼰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뭐 중요한건 아무리 그러한다한들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꼰대들의 나쁜 점: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하는 점, 자신이 이뤄놓은 바를 그 자신의 의의로 생각하는 점  … 같은걸 답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가현

일기장 삼아

뒷말 2012/04/10 21:16
이젠 정말이지 오는 사람이 없어진 것 같아 기쁘다. 어떤 종류의 SNS가 되었건 편집증적이고 자기보호기제로 칭칭 동여매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별로 없다. 그래서 일기를 쓰긴 하지만 암호를 건 일기를 훑어보긴 쉽지않다.

그래서 나의 일기라고 할만한 것 가운데 종종 두고 보면 재미가 있을만한 것, 별로 나 자신에 관한 티가 안 나는 것, 행여나 구면이 있는 사람이 와서 봐도 평판이 쓰레기가 되진 않을만한 글쪼가리들을 옮겨놓고자 한다.
Posted by 가현

삭이기

잡설 2010/09/21 02:49

노력과 열의의 부족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도저히 '먹히는' 글을 쓰기는 쉽지가 않다.
알게 모르게 어쩔 수 없이 구속된 환경에 있다가 가끔씩 잊고 있던 것을 접할 때면, 약간의 고양감과 동시에 유치한 호승심을 느끼며 이 자위성 블로그에 접속했다가 결국 한숨을 쉬고 줄행랑을 치고는 한다.
항상 똑같은 결론으로 귀결되는 이런 포스트들도 이제 지겨운데, 나는 역시 타인에게 뭔가 맛을 보여주려면 좀 퀘퀘한 내가 날때까지 묵혔다가 뭘 하든 말든 해야하는 사람임을 실감한다. 내가 '재밌는 사람들'이 영영 될 수 없다고 인정하는데는 거부감이 들고, 그리고 그렇게 아주 결론을 내리는 것도 미루고 싶지만 일단 현 상황에서 이렇다고 해 두자. 할 수 있는걸 하자는거니까.
이렇게 나 자신의 성격을 골방에 적합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 내용을 떠들어댄다면 그건 이제 개그니까 이만 끝.





Posted by 가현